
극장에서 [하얼빈]을 본 건 개봉 첫 주말이었습니다. 처음엔 큰 기대 없이 현빈이 안중근을 맡았다는 정보 정도만 알고 극장을 찾아갔습니다. 그런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니, 하얗게 얼어붙은 만주 풍경이랑, 총 대신 펜을 쥐고 법정에 서 있는 안중근의 마지막 표정이 계속 머릿속을 멤돌았습니다.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뒤 팝콘 봉지를 들고 나오는 게 살짝 죄책감처럼 느껴질 만큼, 묵직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.
영화 하얼빈 줄거리
줄거리 요약: 모두가 아는 그 사건, 그 사이에 있던 얼굴들
줄거리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. 1909년, 국권을 빼앗긴 조선의 독립운동가 안중근(현빈)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줍니다. 영화는 교과서에서 한 줄로 정리된 사건을 수없이 흔들렸던 사람들의 얼굴과 선택으로 다시 채워 넣어 보여줍니다. 눈 덮인 두만강을 건너는 첫 장면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. 화면이 너무 차가워서 그런지, 난방 빵빵한 겨울 극장인데도 괜히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게 됐습니다.
영화 연출
캐릭터와 연기 – 전설이 아닌 ‘사람’ 안중근
하얼빈의 좋았던 점은, 안중근을 전설적인 영웅 이미지로만 올려놓지 않고, 계속해서 ‘살아 있는 사람’으로 보여주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. 동료를 살리기 위해 포로를 풀어줬다가, 그 결과 더 큰 피해를 낳게 되는 장면에서는 관객인 나조차도 마음속에서 열불을 나게 만들었습니다. 그런데 영화는 그 약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기에, 오히려 그 지점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.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말하는 사람도, 끝까지 흔들리고 후회하는 인간이라는 걸 인정한 상태에서 이어지는 선택이라서 말이죠.
함께 움직이는 동지들의 캐릭터도 꽤 인상적입니다. 극중에서 우덕순(박정민)은 가볍게 농담을 던지다가도, 결정적인 순간에는 누구보다 과감하게 나서는 인물이고, 김상현(조우진)은 감정 드러내기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작전을 굴리는 브레인 역할을 맡습니다. 이들이 러시아·중국을 오가는 여정에서 보여주는 케미는, 단순한 ‘의기투합’이라기보단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사람들의 조급함과 두려움을 덮기 위한 농담처럼 느껴져서 더 씁쓸하게 만듭니다. 전여빈이 연기한 공 모씨 캐릭터도 좋았고, 특히 마지막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짧지만 강렬하게 활약하는 장면은, 보고 있다가 심장이 같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습니다.
액션과 연출 – 총알보다 먼저 박히는 표정들
액션은 생각만큼 화려하게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. 대신 한 번 터질 때마다 확실히 박히는 스타일의 영화입니다. 기차 안 난투극, 눈밭 추격전, 하얼빈 역에서의 극적인 총격까지, 액션마다 동선이 잘 정리돼 있고, 총성과 숨소리, 기차 바퀴 소리가 뒤엉키면서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꽤나 좋습니다. 피를 과하게 보여주기보다는, 총성이 울리기 직전 인물의 얼굴을 오래 잡고 가는 방식이라, 총알보다 표정이 먼저 꽂히는 타입의 연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. 옆자리에서 팝콘 먹던 관객이 그 순간만큼은 씹는 소리를 멈춘 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.
음악과 화면 – 차가운 색감 위에 깔린 서늘한 현악
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색감과 음악입니다. 회색빛 만주 하늘과 눈 덮인 산, 얼어붙은 역 플랫폼 같은 공간이 너무 차갑게 촬영돼서 스크린 전체가 얼음 덩어리처럼 보입니다. 우민호 감독 영화답게 과하게 스타일만 밀어붙이기보다는, 공간 자체에서 서늘함을 끌어올리는 쪽을 택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. 그 위에 조영욱 음악 감독 특유의 현악 위주 OST가 깔리는데, 과장되게 울려 퍼지기보다는 한 발 물러나서 인물들의 숨 사이사이를 채웁니다. 마지막 재판 장면에서 안중근이 자신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말하는 동안 음악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가, 사형 선고 이후에야 조심스럽게 올라오는 구조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.
개인적인 감상
아쉬운 점과 전체적인 인상 – 교과서 한 줄 너머의 안중근
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던 건 러닝타임의 길이가 아니라, 담아낸 내용의 밀도였습니다. 두 시간에 못 미치는 상영시간 안에 안중근의 과거, 동지들과의 관계, 작전 과정, 암살, 재판까지 전부 넣으려다 보니, 중간중간마다 인물 감정선이 훅훅 점프하는 구간이 있습니다. 특히 러시아 쪽 인물이나 일본 측 캐릭터는 더 탐구해볼 만한 여지가 있었는데, 기능적인 역할 이상으로 확장되지 못한 느낌이라 살짝 아쉬웠습니다. 다만 이건 애초에 안중근 영화를 보러 간 입장에서 욕심이 많았던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.
그럼에도 불구하고 [하얼빈]이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은 분명합니다.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건인데도, 하얼빈 역 플랫폼에 그가 다시 발을 디디는 장면에서 심장이 괜히 빨리 뜁니다. 총을 꺼내 들기 직전의 짧은 망설임,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 뒤 변호 대신 자신의 신념을 진술하는 태도까지, “위인전 한 줄”로 줄어들었던 이름에 다층적인 얼굴을 붙여주는 영화라고 느꼈습니다. 극장에서 나오는데, 로비에 걸린 영화 포스터 속 현빈의 눈빛이 아까랑 좀 다르게 보이는 게 이상하면서도, 이 영화가 해낸 일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.
애국심을 강요하는 스타일의 영화는 아닙니다. 그렇다고 가볍게 소비하고 웃으며 끝내기에도 애매한, 어딘가 사이에 걸려 있는 톤입니다. 그런 애매함이 오히려 마음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.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, 교과서에서 본 흑백 사진 속 안중근과 영화 속 안중근이 머릿속에서 겹쳤다가, 또 다시 분리되는 느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. 역사를 그대로 재현했다기보다, 우리가 지금 어떤 시선으로 그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한 번쯤 점검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입니다. 이번 작품은 한 번쯤 극장에서 화면과 사운드에 몸을 맡기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게 하겠습니다.